2004. 5. 「부싯돌」 2004 여름


뉴 미디어와 인문 지식


김   현1)


  20여 년 전 대학에 다니던 시절, 일 년에 한 두 번꼴로 종로 3가의 허름한 건물에 세든 출판사를 찾았던 적이 있다. 조선시대 경학이나 근대 문학 전공자 중에는 더러 그 이름을 낯익어 할 사람이 있을 “세창서관(世晶書館)”이 그곳이었다. 언제나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계셨던 ‘주인 할아버지’ 신태삼(申泰三, 1908-1984) 옹은 자신이 책과 맺어 온 인연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주변에서 문집과 같은 서책을 만드는 일이 있게 되면 그 집에 불려가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일을 돕곤 하였다. 그렇게 책을 만드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친척이 경영하는 책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열일곱의 나이에 자기 스스로 책을 만들어서 보급하는 출판사를 차리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더 이상 칼로 목판을 새기는 방법으로 책을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출판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활자를 이용한 조판 기술을 익혔고, 신문사의 인쇄 시설을 이용하여 도서 출판물의 대량 제작 시대를 열었다. 한문 고전을 출판할 때는 국내에서 활자를 구할 수 없는 한자가 많아 일본에서 조판을 해 오기도 했다. 우편 판매 방식으로 전국적인 서적 유통 네트워크를 운영한 것도 그가 처음 시도해서 성공한 일이라고 했다.

  신태삼의 세창서관은 일제시대의 암흑기에도 대중들 사이에서 새롭게 일기 시작한 지식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문화 콘텐트(content)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십여 세의 젊은 나이에 판각용 조각도를 버리고 활판 인쇄 기술을 배운 것은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뉴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선구적인 도입이었다. 당대의 문화적 콘텐트와 기술 환경을 적절하게 접목시킨 그의 벤처 사업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세창서관이 설립 당시 도입했던 근대적인 출판 기술은 적어도 30여 년 간 그 시대의 뉴 미디어 기술이 담당했어야 할 소임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오늘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세창서관을 기억하게 된 것은 1930년대식의 지식 사업 모델이  그 다음 세대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책이라고 하는 미디어가 그 어떠한 문화적 생산물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인류가 생산한 고귀한 지식 자원이 지식인의 개인적 전유물로 머물지 않고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더욱 발전된 정신적, 물질적 문명을 이룩하는 데 기여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 ‘책’이라고 하는 것이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게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적, 기술적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어 온 미디어 기술(Media Technology)의 소산이라고 하는 점이다. 20세기를 마감하던 시기에 미국의 시사 주간지 라이프지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을 과거 1천 년 동안 일어났던 모든 문화적 사건 중에 가장 위대한 것으로 평가한 이유는 미디어의 변화가 지식과 정보의 변화, 나아가 문화의 변화에 주는 영향력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디어는 새로운 지식을 생산을 촉진한다. 과거에 축적된 지식이라 할지라도 새 매체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면 새로운 응용의 길이 열리게 되고 문화 창조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내 서가의 한 쪽 구석에 꽂혀 있는 세창서관의 책들을 볼 때마다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의 출판 인생을 회고하던 신태삼 옹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의 인상이 오랫동안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가 바로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뉴 미디어 기술 분야의 선구적 인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한국철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우리나라의 고전 자료를 전산화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들어간 것이 1985년. 그 후 거의 20년이 되는 기간 동안 전통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정보화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대학에서는 한국 사상을 강의하면서 전근대 사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왔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사실 한 가지 일이었다. 한국의 전통사회를 연구하면서 그 가운데 무엇이 전승의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과 정보 과학의 기술 발전에 보조를 맞춰가며 고전의 뉴 미디어화를 위한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서로의 목표를 분명하게 만들어 주고 방법을 구체화시키는 상보적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고전 지식이 전자적 매체를 통해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 연구 개발 사업을 수행해 오는 동안 나에게 더욱 더 분명하게 인식되어진 사실은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알기 원하는 우리 사회의 지적 수요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다. 십 년 전 400 책이 넘는 『국역 조선왕조실록』의 전문을 CD-ROM에 담아 출간한 후, 나는 전자화된 고전 지식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되어지는지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전자화된 『실록』의 첫 번째 수혜자는 물론 조선시대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학자들이었다. 연구 논문을 쓰기 위해 사료를 수집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주기 때문에 누구도 이 새로운 미디어의 사용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활발한 이용이 일어났던 분야는 학술 분야보다도 저널리즘의 영역에서였다. 역사 다큐멘터리나 사극의 대본을 쓰는 방송 작가들, 월간 잡지의 교양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이 전자 도서를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조선시대의 역사를 소재로 한 다양한 교양물들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문화 콘텐트의 생산은 그에 대한 수요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절 방송․출판계에서 “조선시대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한 것은 전문학자가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우리의 전통시대에 관심을 갖는 커다란 지적 수요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는 수 년 전부터 인문 지식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정보 기술의 개발에 대해 “인문정보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나의 중심적인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문화와 기술을 아우르는 현대 사회의 복합적 지식 수요에 부응하는 지식 정보의 계발을 목적으로, 문학․역사․철학 등 전통적인 인문과학 분야의 지식과 정보 통신 기술 사이의 학제적 소통 및 응용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정보 기술을 매개로 전통적인 학술․문화 자원을 현대적인 지식 정보 자원으로 편찬․가공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여 전통 문화의 현대화, 국제화에 기여할 지식 정보 전문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적정한 위치에서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풍성한 지식 수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이 수요자의 요구에 맞지 않으면 그 잠재적 수요는 표면화되지 못한 채 사장되어 버리고 만다. 인터넷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보 유통 매체가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오늘날, 젊은 층의 지식 수요자들은 그 인터넷을 통해 즉각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이 선호하는 것은 새로운 지식이라기보다 새로운 매체이다. 오랜 과거로부터 온축되어 온 옛 지식도 새 매체에 실리게 되면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고 그 수요를 증대시킬 수 있다.

  지식과 정보가 페이퍼 미디어에서 전자 통신 미디어로 옮아가는 것은, 오랜 옛날 그 시대의 지식이 죽간이나 양피 두루마리에서 인쇄된 서책으로 옮겨 간 것에 다르지 않다. 옮겨지지 않는 것은 전승될 수 없다. 기껏해야 유물로 남을 뿐이다. 나는 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우리의 고유한 지식 유산이 현대 사회에서도 그 의미를 잃지 않고 더욱 중요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인문 지식과 정보 기술에 대한 학제적인 연구 개발의 노력은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지식과 그것에 대한 현대적 지식 수요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유용한 수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인문정보학